지난 8월 여성가족부는 초등학생 대상의 성교육 도서 배포 사업으로 ‘나다움 어린이책’을 선정했다. 아이들이 여성다움이나 남성다움이 아니라 나다움을 찾는 것을 돕겠다는 의미에서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일부 도서가 논란에 휩싸였고, 결국 여가부는 해당 도서들을 회수했다. 회수한 7권의 책 가운데 6권이 국외 도서였으며, 해외에서 큰 인기를 얻거나 성교육 자료로 널리 쓰인 책이었다. 과연 해외에서는 어떤 성교육이 이뤄질까? 한국의 성교육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콜롬비아, 미국, 독일의 성교육 사례를 소개한다.
콜롬비아의 ‘탈마초’ 성교육
‘마초(Macho)’는 스페인어로 ‘수컷’을 뜻한다.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 문화권에서 주로 ‘남자다움을 지나치게 과시하거나 우월하게 여기는 남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스페인어와 영어로는 각각 ‘마치스모(Machismo)’와 ‘마초이즘(Machoism)’이라 쓴다.
콜롬비아의 반마치스모(반마초) 운동단체 ‘경계 없는 청년 모임’은 학교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탈마초 교육을 진행한다. 이들이 펼치는 교육 현장을 찾아갔다. 교실에서 흥겨운 라틴 음악이 흘러나왔다. 앳된 얼굴의 남녀 청소년 16명이 경보하듯 교실 안을 휘젓고 있었다. “자, 이제 둘씩 짝을 지어 서로 안아줘! 하나 둘 셋!”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들은 우왕좌왕하다가 곧 짝을 이뤄 포옹을 나눴다. 성별은 상관없었다. 어색했던 포옹은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온 교실을 누비는 아이들의 등에 손바닥만한 카드가 한 장씩 붙어 있었다. ‘엉덩이가 큰 여자’ 등 대부분 여성을 비하할 때 쓰는 단어다. 신체 활동을 마친 아이들은 다시 모여 앉아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1시간 넘게 ‘꽃뱀’ 카드를 달고 있었던 도미닉 벨트란(15세)은 분통을 터뜨렸다. “난 꽃뱀이 아닌데, 왜 나를 꽃뱀이라고 하지? 기분이 나빴어.” 반면 ‘필요 이상의 표출’의 주인공 후안 메르찬(13세)은 순순히 자신의 특성을 받아들였다. “실은 이 단어가 나를 잘 표현하는 것 같아. 툭하면 화를 내거든.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버릴 건 버려야 한다고 생각해.”
이 단체 대표인 하비에르 오마르는 아이들 대상인 만큼 몸으로 직접 표현하고 느끼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보디페인팅, 춤, 역할극 등 교육 방법도 다채롭다. 몸을 움직이는 것과 폭력적인 남성성 극복은 무슨 관계일까. 오마르 대표는 말했다. “남성들은 여러 감각을 차단 당합니다. 감정을 표현하거나 느끼는 것 자체를 남자답지 못한 것으로 치부하기 때문이죠. 유일하게 억압받지 않는 신체 부위가 성기, 즉 성욕입니다. 제어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성폭력으로 이어질 수밖에요. 이런 상황에서 ‘콘돔을 쓰자’고 캠페인을 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즉, 그는 ‘성기=남성성’이라는 등식을 깨는 것이 근본 해결책이라고 강조한다.
▼ 콜롬비아 학생들이 탈마초 교육 중 서로의 몸에 기대고 누워 원을 그리고 있다. 타인과 몸을 부딪치고 느끼며 경계를 깨기 위한 것이다.
‘또래 교사’가 가르치는 미국의 성폭력 예방 교육
‘유대여성협의회(NCJW)’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지부는 일선 학교에서 성폭력 예방 수업을 운영한다. 수업명은 ‘대화를 바꿔 보자(Change the Talk)’다. 교사 대신 ‘학생’이 자신의 친구들에게 동의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학생 4명은 교단 앞에 서서 ‘또래 교사’ 역할을 했다. 한 달 전부터 또래 교사가 된 이들은 단체로부터 약 12~16시간 교육을 받았다. 또래 교사들은 칠판 앞 모니터에 성폭력 가해자인 할리우드 유명 배우의 사진 한 장을 띄웠다. “왜 피해자들은 이 배우에게 성폭력을 당했을까?” 또래 교사들이 물었다. 성폭력의 원인에 대해 학생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한 목적이다. 학생들은 다양한 답을 내놓았다. “돈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을 잃기 싫어서?” 또래 교사들은 ‘강간 문화’라는 문구를 모니터에 띄웠다. “강간 문화 때문이야. 성폭력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고 정당화하는 거지.” ‘남자는 성관계에 적극적이며 여자는 소극적이다’ ‘피해자가 문제다’ 등 잘못된 고정관념이 모두 강간 문화에 속한다고 설명했다.
강간 문화에서 벗어나려면 동의를 알아야 한다고 또래 교사들은 설명했다. “명확하고 자발적이어야 하며,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이뤄지는 게 동의야.” 특별할 것 없는 수업 방식이었지만 효과는 큰 편이다.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수업 후 학생들이 강간 문화를 수용하는 정도는 평균 1.61점(5점 만점)에서 1.26점으로 감소했으며, 동의가 없는 성폭력을 이해하는 정도는 평균 3.70점에서 4.23점으로 증가했다.
▼ 미국 로스앤젤레스시 하이테크 로스앤젤레스 고등학교에서 성폭력 예방 수업 ‘대화를 바꿔 보자’가 열리고 있다. 학생들이 교사 역할을 하면서 또래 친구들과 대화로 수업을 진행한다.
독일의 지극히 실용적인 성교육
독일 성교육이 발전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학교 교육으로 성교육은 충분치 않다는 것을 인정한 데 있다. 학교에서 벗어난 성교육은 각자의 교육법을 갖춘 전문가들에게 맡겨졌다. 어디에서 누구에게 받을지는 학생의 선택에 맡긴다. 자유로운 교육법을 인정하는 대신 목표는 분명하다. ‘성적 자기 결정권과 성 정체성을 존중하게 하라’는 것이다. 독일 성교육의 철학은 곧 ‘인간의 권리 교육’이다.
독일 베를린 지역에는 총 10개의 성교육 전문기관이 있다. 이들 교육기관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곳은 ‘프로파밀리아(Pro Familia)’다. 수업은 교사들이 신청하거나 아이들이 익명으로 신청한다. 아이들의 성 고민은 다양하다. 실연을 당해 힘들어서 방문하거나 원하지 않은 임신 문제를 상담하기 위해 오기도 한다. 여성 피임 도구의 사용법과 사후 피임약에 대한 정보도 제공한다. 기관 측은 “요즘 청소년들은 인터넷에서 어떤 정보든 찾을 수 있다.”며 “구체적인 정보를 제한하기보다 올바른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성교육이 전문기관, 시민단체에 위탁되고 있지만 학교는 여전히 독일 성교육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다. 7학년부터 13학년 학생까지 다니는 베를린의 중·고등 통합학교 MBO(MAX BECKMANN OBERSCHULE)는 성교육을 잘 하기로 알려져 있다. MBO는 7~10학년을 대상으로 매주 45분씩 성교육을 한다. 다양한 교과목과 연계해 성교육이 진행된다. 정치 시간에 ‘낙태’에 대해 논의하고 문학 시간에 게이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을 읽는 식이다. 성교육 담당 교사 마누엘라 슈림프씨는 “생물학적인 성은 전체 교육의 한 부분일 뿐이다.”며 “성적 자기결정권, 성적 책임, 존중 등은 다양한 교과목과 연계해야 제대로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 독일에서 가장 큰 성교육 기관인 프로파밀리아의 수업에서는 종이 자를 이용해 성기의 둘레에 맞는 콘돔 사이즈를 사용하라고 알려준다. 정확한 크기를 알면 맞지 않는 콘돔을 사용해 피임에 실패할 확률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