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추억의 한 장면에는 어린 시절 뛰놀던 운동장이 하나씩 있다. 운동장은 또 하나의 교실이고 놀이터이며 추억 창고다. 또한 운동장은 경쟁보다 협동을, 단절보다 소통을 이루어 내는 공간이다. 배문엽 교장 선생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교육의 가치는 운동장으로 상징된다. 아이들이 운동장처럼 넓은 무대에서 자신만의 힘을 기르고 꿈을 좇길 바라는 그는 교육자로서 운동장보다 더 활짝 열린 마음을 갖길 소망한다.
글 유승혜 | 사진 박정수
“아이들이 주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장(場)은 중요합니다.
교사는 그 장에서 무언가를 지시하는 게 아니라 기다려 주는 역할을 하는 거죠.
혹여 실패를 해도 다그치지 않고 인정해 주고요.”
|학교의 모든 곳이 교실입니다
운동장을 바라보고 선 배문엽 교장 선생님의 모습은 마치 캔버스 앞에 선 화가와 같았다. 연못, 정글짐, 씨름장, 장미 넝쿨, 울타리, 발야구 라인 포인트 등 시선이 닿는 곳마다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운동장뿐만 아니라 학교 곳곳이 알록달록 예쁘게 채색되었다.
배문엽 교장 선생님이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안전이다. 정글짐과 철봉 등 체육 시설에 안전장치를 덧대고, 바닥에는 새 모래를 넉넉하게 깔았으며, 차량이 지나가는 곳에는 펜스를 설치했다.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연못에는 맑은 물을 채우고 수생 식물을 넣어 생태 학습장으로 단장했다. 교장으로 경기 솔터초등학교에 부임한 첫해인 2019년, 그는 부지런히 학교 안팎을 정비하고 가꿨다.
솔터초등학교에 처음 들어섰을 때 떠올린 생각도 ‘운동장이 작은데 아이들이 뛰놀기 불편하진 않을까?’였다. 배문엽 교장 선생님은 운동장을 넓히지 못하는 대신 활용도가 낮은 자투리 공간에 놀이 공간을 만들었다.
본관 마당의 전통 민속놀이 그림들(라인 마킹)은 이렇게 탄생했다. 사방치기, 팔자 놀이, 달팽이 놀이 등이 아기자기하게 그려진 바닥 위에서 팔짝팔짝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은 누가 봐도 흐뭇하다.
“개교 후 10년 가까이 방치되어 낡아 있던 학교 시설들을 보수, 보강했더니 바로 이듬해 코로나가 닥쳤습니다. 1년 넘게 아이들이 뛰노는 운동장을 보지 못해 아쉬워요. 그래도 아이들과 함께 심은 장미는 매년 예쁘게 피어 훗날 교정을 찾은 졸업생들에게 소중한 추억이 되리라 믿습니다.”
|꿈틀거리는 학교를 만들고 싶습니다
배문엽 교장 선생님은 1988년 처음 교편을 잡았고 어느덧 34년째 교육자의 삶을 이어 오고 있다. 농촌에서 나고 자란 그는 풀로 제기를 만들어 차고 놀았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곤 한다. 유년의 기억은 곧 그가 집필해 온 체육 교과서에 진놀이, 통일 놀이, 제기차기 등 전통 놀이를 소개하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내향적인 성격이었지만 운동에 있어선 적극적이었던 배문엽 교장 선생님은 교대 진학 후 체육을 전공해 박사 과정까지 수료했다. 이러한 내력 때문인지 지난 교직 생활을 돌아볼 때 먼저 떠오르는 순간들은 체육 시간, 운동회, 자연 활동 등 모두 운동장이 배경이다. 특히 30대 교사 시절, 한 학급이 열 명 남짓이었던 작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시간은 두고두고 꺼내 보는 추억이 되었다.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볼 때 가장 행복한 배문엽 교장 선생님. 그가 바라는 학교는 처음 교사 생활을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뭔가 꿈틀거리는 학교가 좋아요. 생기 있고 시끌벅적한 학교요. 학생은 다양한 활동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찾고, 교사는 각자의 교육 철학을 구현하는 학교를 만들고 싶습니다.”
|교사는 아이들의 잠재력을 밝혀 주는 등불입니다
매년 학교 체육관에서 열린 경기 솔터초등학교 졸업식은 코로나19로 인해 올해 처음 본관 현관에서 간소하게 치렀다. 미리 준비된 ‘레드 카펫’을 밟고 한 명씩 실내로 입장해 교장 선생님에게 졸업장을 받는 방식이었다. 성대하진 않아도 모두가 주인공이 되었다.
“제가 남들 앞에 서는 걸 어려워 하고 말수 없이 조용히 자랐던 성장 과정을 거쳤기 때문인지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재능을 찾긴 어려워요. 교사가 숨은 잠재력을 밝혀 주는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막연히 지식을 주기보다 학생의 자존감과 자긍심을 높여 주는 교사가 좋은 교육자라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배문엽 교장 선생님은 분야별로 여러 가지 활동 프로그램을 만들어 참여 학생에게는 점수나 등수와 무관하게 상을 주는 ‘표창제’를 실행했다. 또 학생, 교사, 학부모 누구든 자유롭게 드나들며 소통할 수 있도록 교장실을 개방했다. 교장실에 출근한 그의 아침 일과는 손님맞이 차와 커피를 준비하는 것이다. 놀잇거리로 꽉 찬 운동장과 사랑방이 된 교장실까지 배문엽 교장 선생님은 항상 소통의 장을 마련해 왔다.
“아이들이 주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장(場)은 중요합니다. 저는 그 장에서 무언가를 지시하는 게 아니라 기다려 주는 역할을 하죠. 혹여 실패를 해도 다그치지 않고 인정해 주고요. 교사나 학부모와의 자리에서도 제가 말하기보다 상대방의 의사를 먼저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이들 모두 사랑 받는 학교를 만들고 싶습니다
평교사로서 마지막 해를 보냈던 2011년, 배문엽 교장 선생님은 스승의 날을 맞아 우수 교원에 선정되어 녹조근정훈장을 수훈했다. 생각지 못했던 정부 포상에 놀랐지만 그간 교육자의 정도(正道)를 잘 걸어왔다는 안도감과 보람을 느꼈다. 그는 이전에도 교육감, 교육장, 장관 표창 등 손으로 꼽을 수 없이 많은 표창을 받았다. 표창에 상응하는 실적도 일일이 나열하지 못할 만큼 수두룩하다. 지도 자료 개발, 녹색사업 수행, 인문 교양 교육 활성화 기여 등 배문엽 교장 선생님이 앞장서 구현한 교육 주요 시책과 연구 실적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양하다. 선생님은 경력 증명서의 실적을 하나씩 볼 때마다 학생들과의 추억이 먼저 떠오른다.
“녹색사업을 수행하며 아이들이랑 텃밭을 함께 가꾼 장면이 생각이 나요. 상추를 수확해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앉아 다 같이 쌈을 싸 먹었죠.(웃음) 한 반 정원이 고작 열 명인데 그중 네 명을 지도해 육상 경기 대회에 내보냈던 일도 생각나네요. 운동회 때 체조 지도도 많이 했습니다. 요즘은 안전 때문에 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인간 피라미드 쌓기 같은 꾸미기 체조를 많이 했었거든요. 한번은 체조 중에 바지에 실례를 한 아이가 있었는데 어린 마음에 상처가 남진 않았을까 지금도 그때의 미안함이 남아 있습니다.”
운동장 위에서 아이들과 나란히 뛰고 웃었던 추억이 많았던 까닭에 교감이 되었던 2012년에는 학생들과 멀어지는 것 같아 아쉬웠다. 그리고 어느덧 교장 선생님으로 불린 지 3년째. 그는 이제 아쉬움 대신 학생들의 안전과 교사들의 교육 역량 발현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고, 학교가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한다. 배문엽 교장 선생님은 올해 3월 김포에 있는 솔터초등학교를 떠나 고양 벽제초등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어떤 교육자로 남길 바라느냐는 질문에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학생을 사랑하는 교육자로, 그래서 학생 개개인이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한 교육자로 남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