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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talk] 열정과 냉정 사이

도시와 멀리 떨어진 학교는 문화생활이 목마르다




강원도에 있는 우리 학교는 전교생이 700명 전후다.
13년 동안의 교직 생활 중 이 학교가 가장 크다.
시내에서만 근무했던 나는 적잖은 문화 충격을 받았다.
그릇된 편견을 잔뜩 품은 채로 갔다가 그것이 깨어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글 이준수(삼척 정라초 교사, <선생님의 보글보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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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악한 시설을 떠올렸다면 큰 오산입니다
도시 출신 교사의 섣부른 착각이었다. 왠지 시골 애들은 옷도 제대로 잘 못 챙겨 입고, 공부할 수 있는 환경도 마땅치 않고, 어딘가에서 캐온 6년근 더덕을 불쑥 내밀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전근 후 출근 첫날부터 나의 오만한 예측은 녹아 사라졌다.
학교 주차장에는 자녀 등하교를 돕기 위해 출입한 독일 3사 차량과 고급 국산 차량이 즐비했다. 국내 최대 석탄 산지인 도계읍에는 두 개의 광업소(탄광)가 여전히 가동되고 있었고,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은 교사의 주머니 사정을 가뿐히 상회했다. 학습 환경도 아주 열악하다고 볼 수 없었다. 도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학원과 공부방이 학생 수에 비례해서 성업 중이고, 원한다면 방문 학습지나 그룹 과외도 받을 수 있다. 훌륭한 시설의 도서관과 청소년 장학 센터는 기본이고. PC방의 PC도 꽤 최신 사양인데다, LTE 전파도 완벽하게 잘 터져서 아이들은 게임을 신나게 즐겼다.

귀하디 귀한 문화 즐기기
대신 문화시설이 귀했다. 우리 반 아이들은 어린이날 혹은 생일에 용돈을 받으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동해시로 놀러 나갔다. 도계읍이 소속된 삼척시의 중심지도 아니고, 교통은 불편해도 거리는 더 가까운 태백 시내도 아니었다. 초등학생이 시외버스를 타고 삼척 터미널에 가서, 동해행 버스로 갈아타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건 영화관 때문이었다. 동해, 삼척, 태백 지역에 하나뿐인 멀티플렉스에 방문하기 위해서. 지금은 코로나 여파로 그러지도 못하겠지만 아이들에게 동해시 영화관 나들이는 일종의 문화생활이자, 영화를 예술의 한양식으로서 체험하는 생생한 방식이었다. 물론 넷플릭스를 구독해도 되고, IP TV로 가정에서 영화를 즐겨도 된다. 그러나 아이들은 어두컴컴한 방에서 혼자 보는 영화가 아니라, 팝콘 냄새를 맡으며 진열된 영화 팸플릿을 뽑아들 수 있는 공간을 원했다.


도농의 격차, 숫자가 다는 아닙니다
흔히들 교육의 도농 격차를 이야기할 때 가구의 평균 소득이나 사교육비 지출 규모를 예로 든다. 쉽게 예상할 수 있듯 시골의 교육 관련 수치는 주요 학군이 위치한 수도권, 대도시에 비해 열세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숫자를 중심으로 도농 격차를 분석하는 외부인의 관점에는 중요한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것이다. 담임으로서 아이들과 한 교실에서 호흡하며 체감한 시골의 어려움은 학업 성적 부진만이 아니었다. 의외일 수 있으나, 문화적 취향이나 삶의 태도 차이가 내게는 도드라져 보였다.
도계읍은 백두대간의 품속에 파묻혀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자연경관이 수려하다. 봉준호 감독이 영화 <옥자>를 촬영한 무건리 이끼 계곡이 있고, 배우 최민식 주연의 <꽃피는 봄이오면>의 배경도 이곳이다. 천연기념물 제178호로 지정된 환선굴과 대금굴도 바로 옆 동네다. 그러나 아이들은 산을 벗 삼거나,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지 않았다. 생활 밀착형으로 즐길 만한 문화 콘텐츠가 부족한 환경에서 아이들은 쉽게 폭력적인 게임이나 사행성 게임 같은 말초적인 놀잇감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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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의 경험은 복리 이자처럼 불어난다

같은 시골에서도 부모의 사회 경제적 지위에 따라 문화생활의 양식이 크게 다르다. 주말을 맞아 서울에서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회를 관람하는 아이와 모바일 게임으로 하루를 다 보내는 아이가 한 반에 있다. 방학이면 광화문 대형 서점을 방문해 부모와 함께 책을 고르는 아이와 유아용 전집이 책장의 절반을 차지하는 아이가 짝꿍으로 존재한다.
문화생활의 차이는 단지 여가를 보내는 방식의 차이로 끝나지 않는다. 아이의 삶의 태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문학 작품과 공연 예술을 즐기는 아이는 삶의 다양한 면모를 이해하고 공감 능력을 기르는 데 유리하다. 뮤지컬 <영웅>을 인상 깊게 감상한 한 아이는 자연인으로서의 안중근과 군인으로서의 안중근을 비교하여 설명할 줄 안다.
체육 활동도 마찬가지다. 온 가족이 수영장 정기 이용권을 등록한 가정의 아이는 음식량을 조절하고, 더 먼 거리를 헤엄치기 위해 꾸준히 운동한다. 좋은 문화 체육 생활에는 절제, 신중함, 배려, 금융 지식 같은 교양과 생활 덕목이 따라붙었다. 부자의 금융 계좌에 적용된 복리 이자처럼.




그래도 초등학교가 공립이라 다행이다

새삼 드는 생각이지만 한국이 공립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운영되어 그나마 다행이다. 공립 학교에 다니는 한, 학생의 거주지가 도심에 있건 외곽에 있건 근무하는 선생님의 수준과 교육 시설의 우수함은 거의 균등하다. 만일 등록금을 학생이 부담하는 시스템의 사립 학교 중심이었다면 가난하거나 지방에 거주하는 학생은 양질의 교육을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여러 사회 계층이 골고루 섞이는 경험도 부족했을 것이고.
최근에 만난 도계 지역 선생님의 소식에 따르면, ‘도계 작은 영화관’이 완공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공사 일정이 조금씩 늦춰져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이번에는 정말이라며 강조했다. 나는 기쁘면서도 아리송한 기분이 들었다. 꿈에 그리던 영화관이 생기면 아이들은 대중교통을 타고 편도 한 시간 이상이 걸리는 동해시까지 가지 않아도 될까. ‘도계는 아름답지만, 입시를 대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면서 강릉시로 이사 나가는 학부모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을까.
나는 부디 ‘도계 작은 영화관’이 오래도록 신작 영화를 상영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건 아직 이 마을에 문화생활에 목마른 어린이가 살고 있다는 증거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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