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간의 독일 생활 중 큰아이는 유치원과 4년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과정에서 엄마로서, 한국 교사로서 바라본 몇 가지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글 백경자(부여 부여여자고 교사, <독일 부모는 조급함이 없다 > 저자)
부모도, 학교도 조급함이 없다
큰아이가 유치원 졸업반이 될 무렵, 유치원에서 예년과 다른 색다른 소식이 들려왔다. '초등학교 입학 준비반'이 개설된다는 것이다. 독일 유치원에는 학습이란 것이 없다. 영어는 고사하고 모국어인 독일어의 알파벳조차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런 생활을 오래 지켜봐 온 입장에서 이번 일은 사뭇 기대감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래, 최소한 알파벳은 줄줄 외우고 학교에 들어가야지' 싶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학부모에게 나눠 준 안내문에는 기대했던 국어(독일어), 영어, 수학 등의 학습 내용은 전혀 없었고, 대신 오리고 붙이고 만드는 창작 활동과 안전 교육, 그리고 소방서, 동물원, 박물관 견학 중심의 체험 학습이 전부였다.
"아니 도대체 왜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 거죠?" 큰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코앞에 두고 유치원 교사에게 던진 질문이다. 그는 이 질문에 오히려 당황해 하며 이렇게 답했다. "학교에 가서 해야 할 공부를 왜 유치원에서 하죠? 미리 공부하면 아는 것만큼 학교생활에 대한 흥미가 떨어져요. 학습은 학교에서 시작해야 해요."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선 이렇게 되묻고 있었다. '유치원에서 안 하면, 집에서라도 하겠지. 독일 엄마들이라고 뭐 크게 다르겠어?'
큰아이 단짝 친구인 사라 엄마에게 이 부분에 대해 물어보았다. "유치원에서는 알파벳을 가르쳐 줄 마음이 없어 보이는데 부모들이 집에서 가르쳐 학교에 보내나요?" 이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학교에 가면 다 해 주는데 왜 굳이 집에서 가르치죠?" 자식 교육에 관심 없는 부모가 어디 있고, 내 자식 잘되길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으랴마는 독일 부모들은 달랐다. 주변 어디를 둘러보아도 아이의 선행 학습에 조바심 내는 부모는 없었다.
숫자의 의미를 묻는 수학 시험
초등학교 시험은 한 학기에 두 번 치른다. 시험이 끝나면 채점된 시험지를 집으로 돌려보내 부모의 확인 과정을 거친다. 채점된 시험지를 보며 초등학교 수학 문제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초등 2학년 수학 시험의 문항수는 35개에서 많으면 40개 정도. 문제 유형은 객관식이 없는 단답형(60%)과 서술형(40%)으로 구성되어 있다. 점수는 문항마다 차이가 있다. 전체 50~60%를 차지하는 단답형 연산 문제는 2점씩, 나머지 서술형 응용 문제는 3점 내지는 4점씩이다. 여기에 보너스 문제 1개가 더해진다. 눈물이 날 정도로 어렵다고 해서 ‘크노블라우흐 아우프가베(Knoblauch Aufgabe, 마늘 문제)’라 불리는 이 문제는 풀어도 그만 안 풀어도 그만인, 말 그대로 보너스 문제다. 하지만 만점을 노리는 친구들은 혹시라도 잃을 점수에 대비해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서술형 문제의 풀이 과정이다. 문제에 해당하는 식과 풀이 과정, 그리고 정답을 적는 것까지는 한국과 동일하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 답 즉, 숫자가 갖는 의미를 적어야 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5명이 10조각의 피자 한 판을 놓고 공평하게 나눈다면 한 명당 몇 조각씩 먹을 수 있나요?’라는 질문에 우리 같으면 ‘10÷5=2’로 끝난다. 그런데 이곳에선 숫자 ‘2’가 갖는 의미의 설명을 요구한다. 즉, ‘2조각은 5명이 공평하게 나눌 때 한 명당 먹을 수 있는 분량이다’라고 말이다. 이것을 놓치면 감점이 되어 만점을 얻지 못한다. 수학은 계산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숫자가 갖는 의미를 읽어 내는 것임을 그들은 어릴 때부터 익혀 나간다
월반과 낙제 사이
“월반을 축하드립니다.” 우리 아이 얘기면 좋겠지만, ‘리오니’라는 큰아이 친구의 이야기다. 리오니는 네 살에 혼자 글을 떼고, 여섯 살에 초등학교에 조기 입학한 소위 타고난 ‘영재’다. 조기입학을 했음에도 여전히 리오니에게 수업은 무의미한 시간이었다. 초등학교의 교육 속도는 거북이만큼 느리다. 더구나 알파벳을 익히는 게 전부인 1학년 국어 시간. 이미 글을 줄줄 꿰고 있는 리오니에게 그 시간이 어떤 의미일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는 부분이다. 담임 선생님은 결국 아이 부모를 불러 ‘월반’을 제안했고, 이 제안을 받아들여 리오니는 입학 두어 달 만에 2학년이 됐다.
나 같으면 꽤 자랑스러워 하며 동네방네 소문낼 일이지만 리오니 엄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를 다시 1학년으로 내려 앉혔다. 아이가 2학년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과 숙제의 양이 너무 많다는 이유에서다. 월반 제도는 중·고등학교까지 계속 적용된다. 여기에는 타인과 외부 기관에 의한 선행 학습과 기계적인 훈련 요소는 일체 배제된다. 훈련과 반복을 통한 맞춤형 영재가 아닌 ‘타고난 영재’를 학교 교육과 수업 현장에서 발굴하고 월반 제도를 통해 학교 교육에 흡수하고 있었다.
월반만 있느냐, 아니다. ‘낙제(유급)’도 함께 존재한다. 기준 미달이면 가차 없이 ‘낙제’다. 이것은 선택이 아닌 강제 사항이다. 능력이 되면 선택적으로 올라가고, 능력이 안 되면 일년 늦더라도 해당 학년의 내용을 강제로 익히고 가게 한다. 학기 말이 되면, 담임 교사는 해당 학생의 학부모에게 학교 측의 입장을 전달한다. 아직 어린 나이에 시기를 놓쳐 못 배우고 넘어가는 것보다는, 낙제를 해서라도 배울 것을 정확히 익혀 가는 것이 아이의 미래를 위해 낫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부모 처지에서야 이런 통보를 받으면 당연히 속상하고 마음 편치 않을 일이다. 하지만 상급 학년에서 나타나는 학습 부적응의 위험을 잘 알기에 그런 권유를 대부분 받아들인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재수라니! 당장은 속상하지만 잘한 선택이었다고 나중에 무릎을 칠 수도 있는 일이다.
과외는 선행 아닌 보충일 뿐
독일 학생들은 선행 학습을 할 이유가 없다. 우선 특목고나 자사고가 없어 굳이 어릴 때부터 앞서갈 필요가 없다. 대학 간 서열이 없는 데다 대학 입학 정원에 맞는 조기 진학 지도(4학년 1학기까지의 성적에 따라 인문계 중학교와 실업계 중학교의 진학 여부가 결정됨)로 선행할 이유가 한 번 더 사라진다. 인기 많은 의대도 3년만 기다리면 들어갈 기회가 주어지는데 굳이 어릴 때부터 머리 싸매며 공부할 필요가 있겠는가! 토론 수업과 프로젝트 수업이 많은 교실 환경에, 객관식 시험 형태가 없는 평가 방식은 선행으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 또한 아니다. 선행을 하면 지루한 교실 수업을 참아내든지 아니면 월반제로 흡수되어 선행의 의미를 무색케 할 뿐이다.
물론 사교육이 이곳에도 있다. 하지만 취미와 관련된 예체능 교육이 주를 이룰 뿐이다. 굳이 학습과 관련된 것을 찾자면 보충 학습을 위한 과외(Nachhilfe)와 학원 수업(Schulerhilfe) 정도. 독일에서 과외나 학원 수업은 한국과는 개념이 전혀 다르다. 부족한 과목에 대한 보충 정도며, 학교 수업을 못 따라가 유급 위험에 처해 있는 학생에 대한 자구책일 뿐이다. 학교 교육을 앞서는 것이 아닌 학교 교육을 따라갈 수 없는 상황에 놓인 학생을 돕기 위함이다. 학생들 사이에선 이런 별도 수업을 받는 학생을 가엾게 여기기는 해도 부러워 하진 않는다. 독일에서의 과외, 그리고 학원 수업은 부진한 학생을 위한 것이라는 인식과 함께 선행 학습은 교육적 가치에 반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
교육에 과연 정답이 있을까?
독일의 학력 간 임금 격차는 어느 정도일까? 2014년 한국경제연구원이 내놓은 ‘한-EU 임금 격차 현황 비교’ 보고서에 따르면 대졸과 중졸 이하 근로자 간의 임금 격차는 독일이 약 2배로, 조사 대상 25개국 중 4위를 차지했다. 얼핏 보면 이런 임금 격차가 학벌 중심의 사회적 분위기를 조장할 수도 있으나 그 열기가 과하지 않다는 게 특이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세전만 보면 임금 격차가 불평등 현상을 심화시키는 것이 맞다. 하지만 OECD가 발표한 실질세부담률, 국내총생산 대비 복지 지출 비중, 그리고 세후 지니 계수(소득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지수) 개선율을 살펴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여기서 실질 세부담률은 소득세와 건강보험료, 국민연금 등의 각종 사회 보험료 등이 임금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뜻하며, 세후 지니 계수 개선율이란 가처분 소득 기준의 지니 계수를 말한다. 먼저 실질 세부담률을 살펴보자.
2013년 독일의 실질 세부담률은 49.3%로 OECD 35개국 중 2위를 차지하여 세금과 사회보험 부담률이 다른 나라에 비해 높음을 알 수 있다. 세후 지니 계수 개선율과 국내총생산 대비 복지 지출 비중을 보자. 2016년 세후 지니 계수 개선율은 41.8%로, OECD 35개국 중 7위를, 국내총생산 대비 복지 지출 비중은 25.3%로 OECD 35개 회원국 중 9위를 차지하였다.
이 지표를 통해 조세와 사회 보장 제도로 소득 재분배를 이루고자 하는 독일 정부의 강한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사회 보장 내용을 구체화시켜 확인해 보자. 최소 1년(전년도 본봉의 67%)에서 최장 30년 이상(매월 약 50만 원) 지급하는 실업 수당, 자녀 한 명당 최장 25세까지 받을 수 있는 자녀 양육비(매월 약 25만 원 정도), 본인 부담률 10%선의 가성비 좋은 의료 보험, 그리고 대학 및 대학원까지의 무상 교육 등이 바로 그 내용이다.
거기다 최저 임금 9.35유로(1만 3,090원 정도, 2020년 기준)에 물가는 안정적이고, 삶의 기본 조건인 주택에 대한 소유 부담 역시 적다. 무엇보다 60~70% 정도를 차지하는 고졸 학력자들이 학력에 맞는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직업 분화 및 직업 교육이 잘 되어 있어 고졸 학력을 가지고 실업자가 될 확률 또한 낮다. 이런 제도와 시스템이 학력에 따른 사회 불평등을 줄이며 학력에 매이지 않는 건강한 사회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교육 환경과 사회적 분위기가 달라 서로 색깔 맞춤을 할 순 없지만 어떤 것이 인간적인지, 행복을 가져올지, 또 정의로운지 사회 구성원 간의 합의로 합리적 답을 찾아갈 문제다. 교육에 정답이 어디 있으랴! 그곳이 어디든 트랙에서 함께 노는 사람끼리 머리 맞대고 풀어 갈 과제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