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talk] 명사의 교실
드넓은 세상을 배움터 삼아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다
작은 돌멩이가 가진 힘은 얼마나 클까? 누군가는 이 말에 코웃음을 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돌멩이를 잔잔한 호수에 던진다면? 잔물결이 점점 파장을 일으키며 고요한 호수에 큰 변화를 일으킬지도 모른다. 작은 돌멩이의 가치를 알아보고, 새로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용감하게 행동하는 것. 배성호 선생님은 작은 돌멩이와 같은 아이들의 힘을 믿고 세상을 함께 변화시키고 있다. 이 넓은 세상에 아이들 스스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길을 내어 주는 배성호 선생님을 만났다.
글 지다나 사진 남궁신
"교사가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 움직일 수 있도록
돕는거죠. 교실의 주인공은 교사가 아니라 아이들이에요.
아이들에게 권한을 주면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해냅니다.
아이들을 믿고 맡겨보세요. 그럼 분명히 교실 분위기가 달라질 거예요."
배송호(서울 송중초 부장교사)
비대면 수업이 끝난 오후, 교실 문을 여니 커다란 덩치만큼이나 존재감을 잔뜩 뿜어내는 곰돌이 인형이 보인다. 이 곰돌이는 배성호 선생님의 반 아이들과 항상 함께한다. 수업 시간은 물론이고, 소풍처럼 단체 활동이 있을 때도 꼭 참석한다. 졸업 앨범에 실리는 단체 사진에도 어김없이 곰돌이가 한 자리를 차지한다.
“올해로 7년째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아요. 전학생이 오거나 학생 수가 홀수일 때, 좋은 친구가 되어 주죠. 심리적이나 신체적으로 도움을 받아야 하는 친구들에게는 단짝이 되어 심리적 안정감을 주고요. 여러모로 고마운 친구예요.”
7년 전, 학교 바자회 때 물건을 못 팔아 울상인 친구에게 산 곰돌이 인형을 교실에 두었는데 교실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우연히 시작한 사소한 일이 공간의 성격을 바꾼 것이다.
교실에 소파를 둔 것도 마찬가지였다. 교실 뒤쪽에 소파를 놓으니 교실이라는 공간이 가진 의미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누워서 쉬기도 하면서 교실을 좀 더 편안하고 친근한 곳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남자 소변기에 파리 한 마리 그려 넣어 화장실이 깨끗해진 것처럼 소품 하나로 아이들의 행동
을 바꿔 나가는 거예요. 교사가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 움직일 수 있도록 돕는 거죠. 교실의 주인공은 교사가 아니라 아이들이에요. 아이들에게 권한을 주면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해냅니다. 아이들을 믿고 맡겨 보세요. 그럼 분명히 달라집니다.”
학기 초 10만~20만 원의 학급 운영비를 반 아이들에게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자치 회의를 열고, 학급 약속을 스스로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학생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도록 하며, 절대 강요하지 않는다. 교사는 그저 사회를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 주고,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 줄 뿐이다.
“민주 시민 교육을 따로 할 필요가 없어요. 아이들이 권한을 행사하다 보면 주체 의식을 갖게 됩니다. 서로 협의하는 과정에서 소속감도 느끼고요. 억지로 시키면 오히려 역효과만 날 거예요. 우리 동네 ‘안전 지도’ 만들기, 국립중앙박물관에 ‘도란도란 도시락 쉼터’ 만들기, 교문 만들기 프로젝트 등 아이들과 함께 참여한 여러 활동도 모두 아이들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거예요. 저는 그저 그 도전을 함께하는 것뿐이에요.”
배성호 선생님은 쌍방향 온라인 수업을 할 때, 아이들과의 첫인사를 꼭 곰돌이와 함께 나눈다. 아이들은 유치하다고 투덜대면서도 곰돌이 덕분에 언제나 웃음으로 수업을 시작한다.
배성호 선생님은 아이들이 직접 사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활동을 적극적으로 돕는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관람객들이 도시락을 먹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것도 배성호 선생님과 아이들 덕분이다. 2012년 서울 수송초 6학년 학생들과 꾸준히 문제를 제기해 온 끝에 이뤄 낸 성과다. 이때도 강요는 없었다. 아이들이 스스로 관심을 갖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지켜보고 응원만 해 줄 뿐이었다. 박물관장과 국회의원 등에게 보낸 수십 통의 편지에 거절이 아닌 승낙의 답을 받기까지 꼬박 7년이 걸렸다. 이 과정을 <우리가 박물관을 바꿨어요!>라는 책으로 엮었다. “그 아이들이 벌써 대학교 3학년이 됐어요. 책은 아이들과 공동 집필하기로 약속했는데 다 졸업해서 저 혼자 썼어요.(웃음) 아이들에겐 좋은 경험이 되었을 거예요. 우리의 목소리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걸 몸소 체험했으니까요. 많은 사람이 어린이를 미래의 주인공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어린이는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국민이자 시민입니다.”
배성호 선생님이 사회 참여 교육을 하게 된 계기는 단순하고 명료했다. 아이들에게 모순된 행동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2004년 서울 당산초에 근무할 때, 아이들에게 수업 시간에 ‘자전거 타기 생활화’를 가르쳤다. 그런데 그다음 날 학교 앞이 안전하지 않으므로 자전거 통학을 금지한다는 가정 통신문을 나눠 줘야 한 것이다. “아이들이 왜 자전거를 못 타느냐고 묻는데 대답을 못 하겠더라고요. 그때 안전한 자전거 길을 새롭게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회적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된 거죠. ”2013년 서울 수송초에서도 사회적 상상력은 계속되었다. 학교 주변의 안전한 곳과 위험한 곳을 표시한 ‘안전 지도’를 만들면서 동네가 조금씩 천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동네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달라졌다. 처음에는 안 될 것 같다고 지레 겁을 내던 아이들이 구청장에게 편지를 쓰고 동네 주민에게 전단지를 건네면서 자신 있게 용기를 냈다. 어른들이 자신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만큼 책임감도 커져 갔다. “아이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게 있어요. 바로 도전 정신이죠. ‘똑똑똑’ 하고 문을 두드려 보는 거예요. 응답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간혹 응답을 주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그분이 기꺼이 문을 열어 주는 분이 있으면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는 거죠. 거절을 당할 때도 있지만 포기하기에는 아깝잖아요. 누군가 한 명쯤은 문을 활짝 열어 줄 테니까요. 그동안 문을 열고 반겨 주신 분들이 많아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사실 배성호 선생님은 새로운 문을 두드리는 데 선수다. 자전거 전용 도로를 만들기 위해서 시민단체 ‘자전거21’에 문을 두드려 오수보 사무총장님을 만났고, 도시 단원의 교과서 집필과 관련해 궁금한 점이 있어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정석 교수님께 문을 두드려 인연을 맺었다. 최근에는 우리 생활 속 유해 화학 물질에 대해 관심을 가지며 ‘발암물질없는사회만들기 국민행동’의 박수미 사무국장님과 ‘노동환경건강연구소’의 김신범 부소장님의 도움을 받았다. 학교 체육관에서 쓰는 용품 가운데 절반 정도에서 카드뮴이나 납 성분 등 인체
에 유해한 화학 물질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배성호 선생님은 ‘유자학교(유해물질로부터 안전하고 자유로운 학교)’를 만들기 위해 또다시 아이들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무작정 문부터 두드리는 거죠.(웃음) 이렇게 인연을 맺은 분들을 일일 교사로 초청을 해요. 그럼 저와 아이들에게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집니다. 초청된 선생님들은 평소 제가 보지 못한 학생들의 장점을 새롭게 발견해 주기도 해요. 자신의 새로운 재능을 알게 된 아이는 자신감이 생기면서 변화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정말 많이 배워요. 교실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연결되는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세상이 전부 연결되었다는 것을 저도, 아이들도 온몸으로 느끼는 거죠.”
배성호 선생님은 자기소개를 할 때 ‘드넓은 세상을 배움터 삼아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는 교사’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교사를 가르치는 직업이라고 여기지만, 오히려 해가 갈수록 아이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에게 배우는 것이 참 많다.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하나씩 발견할 때마다 아이들과 같이 한 뼘씩 자라고 있다는 것을 가슴으로 느낀다. 그래서 앞으로도 지금과 같이 도전하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서 또 도전하려고 한다. 남들이 가지 않는, 가지 못한 길을 나만의 방식으로 길을 내어 흥겹게 내딜 준비가 되어 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세계 지도를 거꾸로 붙여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예요. 고학년 학생들은 왜 정답을 바로 말하지 않고 밀당을 하느냐고 핀잔을 줄 때도 있지만, 그럴수록 밀당의 고수가 되어 보려고요. (웃음) 똑같은 것도 새롭게 다시 볼 수 있도록 엉뚱하면서도 발랄하고 유쾌하게 아이들에게 질문을 할 예정입니다. 내가 왜 이럴까 스스로 생각해 봤는데… 역시나 이렇게 사는 게 재밌고 행복하
더라고요.”
‘한일역사교육학술대회’에 참석한 배성호 선생님은 우연히 일본의 요시다 히로하루 선생님과 인연을 맺었다. 이들은 두 나라의 역사적 갈등을 어린이들의 소통으로 풀어보자는 뜻을 모아 그림 편지 교류를 하기로 했다. 언어는 다르지만 또래의 마음은 통할 거라는 믿음 아래, 76명 초등학생이 2011년부터 2015년까지 그림 편지를 주고 받았다. 며칠 전 배성호 선생님은 일본의 한 박물관에서 이 편지들을 전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본에서 건너 온 전시 소개글과 팸플릿을 본 선생님은 감회가 새롭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