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이 찾아왔던 때, 한은미 선생님은 붓을 들었다. 맑고 촉촉한 수채화를 그리면서 위로 받고 활력도 되찾았다. 태블릿PC를 구입한 이후로는 종이에만 그리던 그림을 액정에도 그리기 시작했다. 터치펜이 붓만큼 익숙해졌을 무렵, 그의 디지털 캔버스에는 수채화뿐만 아니라 직접 제작한 영상, 스케줄러, 다이어리, 스티커 등이 채워졌다. T셀파 홈페이지에서 8천 명 이상의 교사들이 다운로드받은 디지털 교무수첩의 제작자 한은미 선생님을 만났다.
글 유승혜 사진 오경택
번아웃을 극복시킨 ‘물의 맛’
한은미 선생님에게 수채화 그리기는 평범했던 교사 커리어의 변곡점이었다. 교대에서 미술교육을 전공했고 한때 유화도 그렸지만 수채화는 처음이었다. 번아웃을 극복할 요량으로, ‘그냥 좋아서 하는 일이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퇴근 후 매일 수채화 그리기에 도전했다. SNS에 완성작을 공유했고 점차 댓글과 팔로워가 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은 수채화 작가로 발돋움했다. <번짐 수채화>, <스토리가 있는 풍경 수채화>, <수채화 혼자서도 괜찮아> 등 수채화 관련 도서를 3권이나 출간했다. 이후 교직원과 교사를 대상으로 한 수채화 강의를 주기적으로 열고 학생들에게는 수채화 그리기의 즐거움을 가르쳤다.
“종이가 쉽게 울고 칠할수록 어두워지는 등의 이유로 수채화를 어렵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죠. 그런데 종이 사이즈를 줄이고, 배경은 생략하고, 몇 가지 색깔만 사용해도 충분히 근사한 수채화를 그릴 수 있어요. 그리다 보면 수채화의 ‘물의 맛’을 느낄 수 있답니다.”
한 손엔 붓, 한 손엔 터치펜을 들고
수채화를 그린 지 5년쯤 되었을 무렵, 선생님은 디지털 수채화를 그려 보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으로 태블릿PC를 구매했다. 곧바로 그리기 앱을 이용해 실제 물감과 붓으로 수채화를 그린 듯한 그림을 그렸다. 완성된 작품은 자유자재로 변형하고 활용할 수 있어 아날로그 수채화와는 또 다른 성취감이 느껴졌다.
“저는 수리와 기계 쪽으로는 정말 문외한인 아날로그적인 사람이에요. 처음 아이패드를 사용할 땐 기본적인 것도 몰라서 쩔쩔맨 적이 많았어요. 그런데 디지털 수채화를 그리다 보니 점차 다른 영역으로도 관심이 이어지더라고요.”
그렇다고 손에서 붓을 놓진 않았다. 복제가 불가능한, 세상의 단 한 장뿐인 종이 그림의 매력을 디지털로 대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디지털 유튜버로 거듭난 아날로그형 교사
2020년 코로나19 사태 이후 온라인 수업이 활성화되면서 교사들 사이에서 미술 수업에 대한 고민이 들려왔다. 실기 위주의 과목이라 온라인 수업의 제약이 컸던 탓이다. 선생님은 미술 수업을 화상으로 진행할 수 있는 수업 영상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받고 계획에 없던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 이를 계기로 선생님의 관심 분야인 수채화 그리기는 물론 아이패드 활용법, 유용한 애플리케이션 정보 등의 영상을 제작해 올렸다. 영상 촬영과 편집은 자투리 시간에 틈틈이 독학으로 익혔다. 아날로그적인 사람이 운영하는 디지털 전문 채널이 된 것이다 .
“아직 초보 수준이라 부족한 점이 많아요. 그렇지만 기록과 나눔에 의미를 두고 계속 운영해 나가고 싶습니다.”
교사에게 꼭 맞는 디지털 비서의 탄생
태블릿PC는 한은미 선생님의 손발을 대신한다. 업무와 여가, 그 모든 일상을 태블릿PC와 함께한다. 교사의 필수 아이템인 교무수첩 역시 태블릿PC 안에 있다. 태블릿PC용 노트 양식은 많지만 교사에게 딱 맞는 양식이 없어 직접 만들어서 사용해 왔다.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레이터 같은 전문 프로그램의 도움 없이 아이패드 기본 앱인 키노트(Keynote)로 디자인했다. 나름의 노하우가 쌓이자 다른 교사들과 공유하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다. 그렇게 제작한 디지털 교무수첩은 T셀파 홈페이지 무료 나눔 이벤트를 통해 8천 명 이상의 교사들이 다운로드받았다.
“사실 지난겨울에 교통사고로 병원에 한 달간 입원했거든요. 그 기간 동안 몰입해 만든 결과물이 디지털 교무수첩이에요. 힘든 시간이었지만 많은 교사분들이 유용하게 쓰셔서 보람을 느낍니다.”
한은미 선생님은 교직 생활 중 찾아온 번아웃에도, 코로나19 사태에도, 또 갑작스러운 교통사고에도 그만의 돌파구를 만들어 위기를 기회로 헤쳐 나갔다. 손에 쥔 붓 한 자루와 작은 태블릿 하나는 이제 선생님 자신뿐 아니라 아이들과 교사들을 더 큰 세상으로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