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놀이터를 뒷조사하다
막상 답사를 간 유럽의 놀이터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북유럽 또한 SNS에 회자되는 몇몇 놀이터 빼고는 4S라 불리는 조합놀이대(play structure), 미끄럼틀(slide), 시소(seesaw), 그네(swing)로 채워진 경우가 많았다. 또 최근 우리나라의 놀이 시설물이나 놀이터 디자인이 빠르게 발전되어서인지 놀이터 디자인도 그리 흥미롭지 않았다. 하지만 놀이터에서 느낀 일상의 공기는 달랐다. 아마도 놀이와 놀이터 문화가 달라서일 것이다. 그런데 이 문화를 읽는 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급하게 스마트폰이 이끄는 경로로 놀이터를 찾아가 후루룩 사진 몇 장을 찍고 돌아서서는 안될 일이다. 마음 같아서는 놀이터 옆에 방을 잡아 놓고 매일매일 놀이터를 방문하며 놀이터의 일상을 관찰하고 싶다. 그럴 수는 없으니 답사하며 남다르게 눈에 들어왔던 놀이터를 뒷조사하게 된다. 이 글은 그 기록이다.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만난 정크놀이터
2019년 겨울 늦은 오후에 찾은 스웨덴 스톡홀름의 랄람쇼브 공원(Raambshovsparken)의 롤리스 공원 놀이터(Rais Parklek)는 추운 날씨와는 상관없이 활기로 꽉 차 있었다. 바람 한 점 들어갈 수 없도록 점프수트와 긴 장화, 두툼한 모자와 장갑으로 무장을 한 어린이들이 모래와 하나 되어 여기저기서 놀고 있었다. 그런데 놀이터의 모습이 낯설었다. 산만한 공간 구성, 아무렇지 않게 페인트로 쓰이고 그려진 글과 그림으로 장식된 풍경은 스톡홀름의 다른 놀이터와도 사뭇 달랐다. 이 놀이터를 소개해 준 스톡홀름의 공무원은 정크놀이터로 조성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해 주었다. 유럽의 정크놀이터는 덴마크에서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황폐해진 도시에서 노는 어린이들을 보며 조경가 칼 테오도르 소렌센(Carl TheodorSorensen)과 교사 한스 드라이엠(Hans Dragehjelm)은 새로운 형태의 놀이터를 구상했고, 1943년 코펜하겐 엠드럽에 ‘정크놀이터(junk playground)’라는 이름의 놀이터를 만들었다. 건축물 폐자재로 만들어져 마치 공사장처럼 보이지만, 인기가 좋아 당시 하루에 약 900명의 어린이가 찾았다고 한다. 정크놀이터는 영국으로 넘어가서는 모험놀이터(adventure playground)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고 다시 일본으로 넘어가서는 플레이파크(playpark)가 되었다.
아빠의 손을 잡고 자유롭게 노는 아이들
정크놀이터의 정신을 이어받아 어린이의 자율성을 가능한 한 보장하려는 롤리스 공원 놀이터 중앙에는 몸 놀이를 유도하는 조합놀이대가 모래 범벅이 되어 서 있고 흙 놀이를 더욱 흥미롭게 하는 시설물도 곳곳에 있다. 또 한쪽에는 어린이용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작은 트랙이 있고, 어린이들이 직접 만든 나무 집이 모여 있는 공간도 놀이터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 페인트로 장식된 나무집을 구경하는 맛이 쏠쏠했고,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 놀이를 한 흔적도 볼 수 있었다. 놀이터에는 작은 건물도 있는데, 그 안에는 작은 냉장고와 주방 시설이 있어서 간단한 간식도 만들어 먹는 듯했다. 건물 내부도 정돈되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였다면 위생적이지 않다는 민원이 쇄도할 듯했다.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놀이터의 공간 구성과 요소 요소도 흥미로웠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아빠와 어린이들이 손을 잡고 놀이터에 등장하는 모습이었다. 3시를 넘긴 늦은 오후 어린이의 손을 잡은 아빠들이 속속 나타났다. 동행했던 직원이 ‘시내에서는 보지 못했던 멋진 남자들이 모두 이곳에 있다’는 표현을 했을 정도로 개성이 돋보이는 옷차림을 한 아빠들이 어린이들과 신나게 오후의 시간을 쓰고 있었다. 흙 놀이를 함께하기도 했고 뛰기도 했다.
덴마크 학교 운동장에는특별한 놀이터가 있다?
다른 인상 깊었던 사례는 덴마크의 학교 운동장 놀이터들이다. 파쿠르(parkour)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공간, 수다를 떨 수 있는 공간, 나무 사이를 가로지르는 조합놀이대가 있는 공간 등등 다양한 디자인 언어를 볼 수 있었다. 2012년 자선단체인 ‘레알다니아(Realdania)’와 덴마크 암협회가 함께 시작한 ‘학교 운동장 활성화하기(Activating School Yards)’ 사업의 결과물이다. 이 사업으로 콘크리트 바닥으로만 채워졌던 썰렁한 학교 운동장은 놀이터와 숲이 결합된 형태로 변화했다. 이 사업은 점점 부족해지는 어린이들의 운동량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덴마크에서는 7~15세 어린이들의 약 86%가 클럽 혹은 협회의 일원으로 운동하고 있으나 많은 수의 어린이가 덴마크 보건당국에서 기준으로 삼는 하루 60분의 놀이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있다. 덴마크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린이가 하루 대부분을 보내고 있는 학교 운동장에 주목했다. 중간놀이시간 혹은 자유 시간을 활용하여 신체 활동의 수준을 높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7개의 학교가 이 사업에 참여했고, 어린이와 학교 선생님, 지역사회가 참여하는 워크숍을 거듭하며 디자인을 발전시켰다.
놀이터가 바뀌면 어린이의 신체 활동량 수준이 올라간다
단순히 개선 사업에서 끝나지 않고 치밀하게 효과를 평가했다는 데 이 사업의 또 다른 미덕이 있다. 공식적 평가는 덴마크 남부대학교(University of Southern Denmark, SDU)에서 진행했고 캠페인 기간 중 두 건의 박사 논문도 나왔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운동장 개선 이전 대비 학교 일과 시간 중 어린이들의 활동 시간은 10분 증가하였으며, 이 중 5분은 중간놀이시간 중의 활동시간 증가이다. 활동량이 가장 적었던 어린이의 경우, 중간놀이시간의 야외 활동 시간이 4분 증가한 것을 포함하여 전체 일과 시간 중 야외 활동 시간이 총 12분 증가했다. 한 박사 논문에서는 중간놀이시간에 어린이들의 신체적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12가지 요인을 파악하였다. 그것은 ‘① 신체적 특성과 능력 ② 성별 ③ 성별을 반영하는 학교 문화 ④ 어린이 간의 영향 ⑤ 갈등 및 배제 ⑥ 공간과 장소에 대한 경험 ⑦ 놀이기구의 부족 ⑧ 야외 놀이에 대한 지지 ⑨ 스마트폰, 휴대기기 사용 ⑩ 중간놀이시간 길이 ⑪ 조직적인 활동 ⑫ 날씨’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놀지 않는 이유
스웨덴의 사례에서는 자유로운 놀이터의 풍경과 아빠와 어린이가 함께 놀이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장면이 흥미로웠고, 덴마크 사례에서는 치밀한 사전 조사와 모니터링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최근 우리나라의 놀이터 디자인은 많이 나아졌지만, 어린이들은 여전히 놀이터에 가지 않는다. 어린이들의 놀이 부족이 놀이터 디자인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걸 보여 준다. 어린이의 놀이를 이해하고 지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우선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놀이터를 말할 때, 디자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린이에게 왜 놀이가 중요하고 필요한지를 알아야 정크놀이터 같은 자유로운 놀이터 풍경도 우리나라에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린이가 일상 속에서 어떻게 놀고 있는지를 연구해야 하고, 부모와 학교, 지역사회는 어떤 지원을 해야 하는지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놀이터의 외관이 아니라 이면을, 그리고 우리의 놀이터를 이야기해야 할 때다. 이 글이 새로운 고민의 시작점이 되었으면 한다.